성경과 성령 135 제2일

성경과 성령 135 제2일 
시편 119.17-32, 창세기 4-6, 시편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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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성경 큐티: 시편 119.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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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자의 영혼은 어떤 상황에 있는가? 땅 위를 떠도는 나그네이다 (19). 영혼이 진흙 속에 뒹군다 (25). 영혼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28).
– 주변에서는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려고 하며 비웃으려 한다 (22). 고관들이 그를 해롭게 할 음모를 꾸민다 (23).
– 그는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그는 주님의 종이라고 스스로의 신분을 고백한다 (17, 23). 주님의 교훈을 배우는 제자라고 부른다 (24). 
– 기도자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왔는가? 그는 주님의 율례를 늘 사모했다 (20). 그는 성실한 길을 선택하고 주님의 규례를 언제나 명심한다 (30). 
– 기도자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믿음을 고백하는가? 하나님은 오만한 자들을 책망하시는 분이다 (21). 하나님은 나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다 (25). 하나님은 내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26).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다 (27). 
– 기도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무엇을 고백하는가? 말씀 안에는 놀라운 진리가 있다 (18). 육체가 쇠약해질 정도로 사모할 가치가 있다 (20). 주님의 계명에서 이탈하는 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21). 주님의 말씀은 기쁨을 주며 나의 스승 (상담자)이 된다 (24). 
– 기도자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가? 나를 너그럽게 대해 주십시오 (17).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18). 주의 계명을 감추지 마십시오 (19). 나에게 새 힘을 주십시오 (25). 오만한 자들이 나를 멸시치 못하게 해주십시오 (22). 주님의 율례로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26). 주님의 법도를 따르는 길을 깨닫게 하십시오 (27).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28).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29). 주님의 법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29).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31). 큰 깨달음을 주십시오 (32). 
– 기도자는 어떤 결단을 하는가? 그는 오직 주님의 율례를 묵상하겠다고 한다 (23). 그는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묵상하겠다고 고백한다 (27). 
– 기도자는 기도 응답의 결과로 어떤 것을 기대하는가? 활력이 넘치게 되는 것 (17). 주님의 증거가 그에게 기쁨을 주며 스승이 되는 것 (24).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달려가는 것 (32).

+ 시편 119편은 기도의 119라고도 부른다. 십자가 고난이 닥쳐올 때, 불황과 환란이 꿈틀거릴 때, 고통을 통과할 때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시편의 기도자처럼 갈망하는가? 하나님 말씀 대신 다른 것을 갈망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고통 속에서 이런 간구를 하는가?
+ 우리는 기도 응답의 결과로 상황의 호전을 구하지 않았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달려가는 것을 갈망할 때 어떤 포괄적인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날까?
+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기도 속에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시편 기자처럼 고백하는 기도가 열린다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 세상의 주변부에 살아가는 나그네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관들과 오만한 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담대함과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 예수님은 이 시편이 묘사하는 바로 그 기도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기도응답의 결과로 우리는 어떤 삶을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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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경일독 (3장): 창세기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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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의 첫 자손들 중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가인은 손해 보는 것은 눈곱만큼도 안하는 사람이었다. 
–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비용의 지불이 포함될 때를 의미한다. 아벨의 제사에는 비용 지불이 있었다.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
– 주는 사람에게 아무런 손해가 없다면 그것은 자기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 동생을 시기심과 미움으로 죽인 것은 자신이 손해보는 것은 못견디기 때문이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데도 걱정한다. 자신이 피해보는 것만 심각하고, 자신이 피해준 것은 무심하다. 이것이 악이다.
– 가인의 후손 라멕도 그러하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고 남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내가 상처 받는 것이 심각하다. 이것이 악이다.
–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싫어서 남에게 손해 입히는 것이 악이고, 내가 입은 한 가지 피해와 남에게 갚는 일곱 배, 칠십칠 배 보복을 동일시하는 것이 악이다.
– 선이란 단지 착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경비를 부담하면서 남이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내가 비용을 부담하면서 남이 잘 되게 하는 것이다. 
– 비용 부담이 없다면 선이 아니다. 경비 부담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나에게 댓가 지불이 없다면 사랑도 아니고 선도 아니다. 
–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하기 위하여, 선을 이루기 위하여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 창세기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형상대로 지으시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마침내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 닮게 하기 위해 그들의 부패를 담당하기로 하셨다.
–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믿음의 족보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상을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낳고 기르고 수고하고 노동하며 자신들의 인생을 비용으로 지불했다.
–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수많은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며 고독하게 견디는 비용을 지불했다.
– 땅이 부패하다는 것은 투입보다 산출이 적은 이기성을 말한다. 인류의 포악함이란 내게는, 우리에게는 선대하고, 남에게는, 그들에게는 악하게 대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신다는 것은 투입과 산출이 유지되는 평형성을 생태계가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는 것도 사회적인 주고 받음이 균형을 이루어 형평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손해, 피해, 고난, 고독, 비용, 댓가, 희생, 수고를 입더라도 기꺼이 끌어안는 삶이다.
– 째째함, 인색함, 쪼잔함, 얌체스러움은 복음의 결이 아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잠복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악을 다스리고 선을 행하라고 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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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편기도 (5장): 시편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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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6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죄인은 악에 둘러쌓여있다. 악을 행하는 이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다. 
– 악행이란 꼭 극악한 이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무시하는 것이 악이다. 
– 나의 안전을 위해 남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악이다. 나의 편안을 위해 남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악이다.
– 선을 베풀지 않으면 악이 쌓인다. 이기적인 사회에서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선을 행하기가 어렵다.
– 복음으로 살려고 하면 쉽게 되지 않는다. 수년에서 수십년 동안 축적된 방어기제와 전투방식은 질기다.
–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탄식하며, 근심하며, 눈물을 흘린다. 수척해질 정도로 밤마다 기도한다.
– 나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어떠함을 안다. 은혜를 베풀며 나를 고쳐달라고 간구한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 소리에 귀 기울이신다. 그의 울음 소리를 들으신다. 그의 근심을 긍휼히 여기신다.
– 시편의 기자가 단지 처지가 어려워서 기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악함 때문에 근심하며 기도했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신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울며 기도하셨다.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애통하며 기도하신다.
–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영생을 주셨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셨다. 
– 손해보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나. 조금이라도 선을 행하면 본전 생각이 앞서는 나. 베풀면서도 나를 먼저 생각하는 좁디좁은 나. 
– 그런 나를 고쳐달라고 예수님은 대신 기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있다.

 

2019년 1월 2일 뉴시티교회 오종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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