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영웅의 시대는 언제나 전설이었습니다. 신앙의 세계, 영성의 세계에서 절대자 앞에 선 단독자라는 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크리스천이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결정을 통해 신앙인이 되는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기가 있기까지 여러 사람의 수고와 노력과 보이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더욱이,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주님의 백성 안으로 소속이 됩니다.
장작이 하나일 때는 불이 활발하게 타오르기 어렵지만, 장작들이 여럿 모이면 서로를 불붙게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이렇게 서로를 붙들어주며 영성의 불을 붙여주는 것이 바로 소모임입니다.
소모임은 동호회가 아닙니다 – 애호하는 것이 같아서 모인 것은 꼭 아닙니다. 소모임은 친목회가 아닙니다 – 서로 친해서 모인 것은 꼭 아닙니다. 소모임은 계모임도 아닙니다 – 외롭고 심심해서 모이는 것은 꼭 아닙니다. 소모임은 동창회나 동향모임이 아닙니다 – 같은 배경이나 역사를 공유해서 모인 것은 꼭 아닙니다. 소모임은 친구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 적대적이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 소모임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소모임은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모임들과 다릅니다.
소모임으로 모이는 이유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내밀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서너 명의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고,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심지어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우리와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고 약속도 주셨습니다.
소모임을 하는 목적은 우리가 “짐을 서로 지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거든 스스로 속임이라”(갈라디아서 6:2-3). 사람이 대중 속에서 고독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참된 자기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 속는‘ 일이 발생합니다. 자기 짐이 너무 커보여서 과도하게 낙담하고 침체될 때도 있고, 자기 문제(짐)가 안보여서 어려움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계속 못찾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짐을 지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서로의 영적인 짐을 함께 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다 우발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군중 속에 파묻혀서 관객의 입장으로 종교행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은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들이 되라는 의미합니다.
적게는 두세 명부터 대여섯 명까지, 그리고 많게는 열명 안팎까지가 우리가 유의미한 영적 순례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종류의 소모임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부터 주님이 명하신 소모임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내딥니다.
다음은 성경적 소모임의 유익들입니다.
성경의 깨달음과 적용이 풍성해집니다.
기도하는 기쁨과 응답이 풍성해집니다.
마음을 나누는 동반자들을 얻게 됩니다.
건강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마음의 아픔과 슬픔이 치유받습니다.
유혹과 시험에 승리를 누리게됩니다.
성품이 주님을 더욱 닮게 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살 지혜가 생깁니다.
소모임의 방법은 주님께서 다양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방법에 있어서는 융통성있게, 원리에 있어서는 신조 있게 우리의 소모임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일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저는 신뢰합니다.
뉴시티교회 오종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