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자유를 주장하고 독립을 선언하여 내 힘과 내 실력만 의지하여 사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모습이다. 일명 ‘탕자’라고 하는 경우이다. 전통적인 가치관과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사는 것은 고루하고 지루하므로 자유분방한 삶을 선택하여 자기를 표현하는 삶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 그랬다.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내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부친을 이제 죽은 셈 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하는 존재이며, 짐승에서 초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어두운 구름 사이에서 번뜩거리는 번개와 같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방식은 단지 부도덕한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내가 신 또는 초인이 되어 살겠다는 마음이다. 나의 자원과 실력만을 의지하여 살겠다는 것이 핵심인데, 문제는 그 자원과 실력이 언젠가는 바닥이 난다는 점이다. 니체는 사람이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멋있게 주장했지만, 초인이 되는 방법은 제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피하는 또다른 방법은 종교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모습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것은 절대자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 이행함으로써 절대자를 피하는 것이다. 집을 떠나는 모습이 아니라 집에 철저히 머무는 방식이다. 의무를 다하며 규칙을 준수하며 도리를 지킨다. 그래서 자신이 절대자에게 책잡힐 만한 여지를 없애려는 시도이다. 선행과 도덕을 다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이 더이상 자신의 삶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만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십계명 준수라든지 종교활동 참여라든지를 모두 한다. 그 동기는 복을 받는 것이고, 화를 면하는 것이다. 내 의무를 다하는 선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간섭하지 못하게 하며, 내가 축복을 받는 선에서 거래와 교섭행위로서 조건적인 종교생활을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마음에 초대하지 않으면서 종의 마음을 갖고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일이 안되면 분노하고 원망한다. 내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 화를 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 맏아들의 모습이다. 그는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 아니었다. 종의 마음으로 일을 했다. 의무를 다한 것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는 그 잔치에 들어오길 거부한다.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지 못한다. 그는 집안에 있는 또다른 ‘탕자’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복음은 우리가 이 두 가지 성향의 탕자 (집을 나간 탕자 & 집 안에 있는 탕자) 모습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 없이 나혼자 살겠다고 하는 거부의 몸부림에서 돌이켜야 함을 말씀하신다. 또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 조건적이고 거래적인 종교활동을 하며내가 이만큼 선하고 올바르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서도 돌이켜야 함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창조주이신 아버지가 우리를 맞아주시기 때문이다. 두 아들을 맞으러 아버지는 두 번 집 바깥에 나오신다. 우리에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 신앙은 결코 부도덕하지 않으며 도덕을 포괄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때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뉴시티교회 오종향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