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기존신자들의 관심사 위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기존신자들이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고 전도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 것이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기존신자들의 필요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신자들이 더 복음으로 만족하고 더 복음으로 열매맺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전도적 교회개척 사역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인에게 권할 수 있는 교회
보통의 교인들은 전도는 하고 싶어하지만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는 권하지 못합니다. 어떤 연례집회가 되어야 그런 일을 하곤합니다. 그것은 평소의 예배에 지인들이 왔을 때 느낄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미리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내부자 위주로 움직이는 폐쇄적인 양상으로 예배가 이루어지고 모임이 돌아갈 때, 사람들은 지인들에게 교회를 소개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평소의 예배 가운데 믿음이 아직 없는 사람들의 고민이 터치되고 , 그분들이 가진 생각들이 존중되고, 질문들이 답변되고, 그분들의 인생에 복음이 어떻게 유효한 답이 되는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특별집회 때만이 아니라, 평소의 주일예배 가운데에서도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여러 주제를 관통하는 가운데, 모든 성경본문 속에서 ‘들리는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성공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비신자들이 계속해서 나아오고 있다는 점, 교우들이 지속적으로 지인을 초청한다는 점, 그리고 초청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노력을 계속 한다는 점에서 느린 걸음이나마 바른 걸음을 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장년 새신자도 신앙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교회
성년이 되어서 신앙을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30대, 40대, 50대인 경우에 인생관은 이미 확립돼 있고, 자신의 안목과 관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에서는 설교자가 교우들을 어린 애들 대하듯 가르치고 훈계합니다. 설교에는 강한 권면도 필요하고, 영적으로 아비의 심정이 되어서 아이를 양육하듯 해야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접한 많은 새 신자들은 청장년으로서 교회를 시작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고 고백합니다. 흔히 듣게 되는 너무나 빤한 설교들은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판에 박힌 식상한 답변은 공허한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기존 신자라면, 경제학을 잘 모르는 목사가 성경본문을 피상적으로 이해해서 경제전문가를 훈계하는 아이러니를 감내할 수 있겠지만, 교회에 처음 오는 신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일반상식의 결핍에 따른 부정확한 지식이 설교의 전반적인 권위를 깎아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설교들이 청장년 성도들을 훌륭한 집사님, 괜찮은 권사님인 것처럼 전제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몰라도 아는 척을 하고 있어야 하는 분위기가 은연중 조성됩니다.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청장년이 신앙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교회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곳이 되고 맙니다. 머리 다 큰 어른이 신앙을 갖는 것은 어렵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머리 다 큰 어른이 제대로 알고 믿을 수 있도록 성경을 대하고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수십년 살아오면서 자신의 직업분야에서 구축한 전문성과 경륜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어린 아이 취급하면서 무조건 따라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의 복음이 구원의 진리일 수밖에 없는지, 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를 복음 속에서 찬찬히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공부는 대화식으로, 때로는 일대일로 진행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입니다. 니고데모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어른이었습니다. 그들은 청장년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거듭났고, 제자가 되어 헌신했습니다. 어린이사역도 물론 소중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어린이를 키워서 제자로 세운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성인들을 불러서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모델을 따른다면, 목회자들이 장년을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장년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계관이 확고한 만큼, 질문도 많고 고민도 진지합니다. 그런 진지한 생각만큼이나 목회자들이 진지하게 장년들을 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믿는 분들은 진지하게 전적으로 헌신합니다.
복음을 알아가고 복음과 씨름하는 것이 중심인 교회
복음이 관계의 접촉점이 되는 교회가 영적인 교회입니다. 사회적인 공통점이나 인간적인 유대가 관계를 돕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라면 교회다운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비즈니스와 친교와 인맥이 중심인 교회를 어찌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부조금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양반에 속합니다. 부조금 낸 것 돌려받기 위해서 교회를 참고 다닌다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통탄할 일입니다. 복음이 관계의 접촉면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알아가고, 복음과 씨름하는 것이 사람들의 삶과 나눔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많이 순종할 때 우리의 나눔 속에 복음으로 어떻게 우리의 문제들을 풀어가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문제들을 – 늦어지는 결혼, 하우스 푸어, 특이하게 행동하는 자녀, 실망스러운 일, 이루지지 않은 꿈, 분노, 좌절, 죄의 유혹 등 – 우리가 복음 속에서 어떻게 씨름하며 어떻게 해결해 가는지를 공동체적 만남 속에서 나누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와서, 사람들의 인생 문제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소그룹 모임에서, 개별적 만남 속에서, 설교를 통해서, 성경공부 속에서, 기도 나눔 속에서, 식사 교제 중에서 복음이 어떻게 삶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보고 듣게 될 때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전도의 순간이 됩니다. 전도적 교회가 되고, 전도적 소그룹이 되고, 전도적 모임이 됩니다.
역사상 가장 정도를 잘하는 교회들에는 전도부서가 없었습니다. 마케팅을 전도에 접목한 것으로 유명한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 교회보다 훨씬 회심전도가 많이 이루어지는 뉴욕의 리디머교회에는 전도부서가 아예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교회의 존재 자체에 복음의 열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만남과 나눔의 중심에 복음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도부서가 없지만 생활 속에서 전도가 일어나고, 전도집회가 없지만 회심전도가 일상화되는 교회가 가장 바람직한 전도적인 교회입니다. 교회의 공식적/비공식적 모임에 비신자가 언제 와도 복음을 엿들을 수 있는 교회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전도적 교회입니다.